사회

90년대에 한국에서 미셀푸코는 왜 센세이션이었나?

페르소나12 2022. 5. 9.

1. 한국에서의 미셀 푸코의 흔적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 수 있으나 1990년대 한국에서는 푸코가 유행했었다. 아니, 거의 센세이션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사람 저 사람, 이 분야 저 분야에서 푸코를 얘기해대고 있었다. 그는 당시 한국에서 고상한 사람 행세를 하려면 꼭 몇 마디 아는 척해야 될 인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건축과 미술, 무용을 공부하는 예술가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사회학에 몸담고 있는 사회과학도들도, 또 법학과 범죄학을 공부하는 법학도들과 1초짜리 이미지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온종일을 주저 없이 바치는 광고인들에게도 푸코의 이론은 첨단을 달렸다. 그러니 세상은 곧 문학이라고 외쳐대는 문학가들이 그를 가만둘 리 없고, 사는 것이 곧 문화라고 주장하는 문화 연구가들도 푸코는 필독서'라고 얘기했다.

왜? 모든 분야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공통분모적인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한마디로 싸잡아 그 질문에 대답하기는 어렵다. 굳이 하자면 두리뭉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푸코는 당시 현대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설명을 그 어떤 이론가보다도 설득력 있게 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거의 예언적으로 말이다.

푸코는 미래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서구 자본주의가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기본 원리들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확히 지적했다. 그러니까 푸코를 읽으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는 얘기다. 푸코 이론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힘, 지식, 몸, 그리고 성에 관한 이야기들이 당시에도 요지경 속이었던 세상을 풀어나가는 데 큰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푸코가 각광을 받고 있었다는 얘기다.

푸코 이론이 서양에서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한국에서도 덩달아 푸코 타령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홍수 속에서도 왜 푸코가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당위성을 담은 글을 아직 찾아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푸코가 유럽이라는 집을 떠나 한국에서 유행으로 떠돌아다니려면 한국에서만 겪을 수 있는 압박과 설움이 있어야 했는데도, 아무도 푸코를 괄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의 푸코에 대한 대접이 너무 극진해 민망할 정도였다. 간혹 푸코를 신랄하게 비판한 '논문 들도 눈에 띄었지만, 이런 글의 맹점은 서양이라는 무대를 염두에 두고 서양 학자들이 써놓은 비평서의 직역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라는 데 있다. 그런 비판들이 한국에 또는 한국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서양에서 이런 점이 말이 안 된다고 하니 한국에서도 그런 비판이 가능할 것으로 가정해 기정사실이 되곤 하는 꼴이었다.

90년대 이런 양상은 물론 푸코에만 한정된 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서양이론을 소개하는 과정이 모두 그렇다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푸코가 한국을 설명하는 데 엄청난 설명력을 지니고 있는 부분도 있고, 한국의 문화 현실에 비추어 보아 말이 안 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말 되는 점이 말 안 되는 점보다 많다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그 점을 얘기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론 중 중요한 개념이면서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론들을 중점적으로 추가적으로 소개하겠다. 따라서 이 글은 푸코의 모든 저서를 소개한 것이 아니고 한국 상황에 가장 알맞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인정하는 두 권('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될 것이다. 이 책들을 상세하게 설명한 다음 푸코와 한국의 당시 현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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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셀 푸코의 소개

푸코는 1926년 프랑스 뿌아띠에에서 태어나 1984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말년을 에이즈로 오랫동안 시달리다 죽었으니, 평소 자신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며 지내왔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죽음을 의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에이즈에 걸려 서서히 몸이 꺼져가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을 때 느끼는 인생의 의미란 보통 사람들이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하물며 철학자가 느끼는 죽음의 의미란 특별한 것일 텐데, 아마도 그래서 푸코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까지도 연구를 계속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의 연구 과제들이 그 자신의 인생과 어느 정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도 해보게 되는 것은 그가 동성애자로서 남다른 경험의 소유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푸코의 학문적 성과가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의 산물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무리한 논리의 비약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일부 심리학자들이 어느 사소한 심리현상 하나를 물고 늘어지면서 한 사람의 됨됨이를 오로지 그런 특별한 성격의 소유자로 축소해 규정짓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생각이다. 다만, 동성애자로써 겪어야 했던 특별한 체험과 거기에서 비롯된 색다른 시각은 분명히 그의 이론 정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간다.

이런 체험의 중요성은 푸코 자신도 어렸을 때를 회상하면서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의사 아버지를 둔 푸코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여덟 살 때 나치에 의해 희생된 돌푸스 수상의 살해 사건이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었다고 말한다. 곧이어 경험한 전쟁은 영원히 기억 속에 각인된 상처이자, 또 최초로 느낀 사생활의 위협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푸코는 바로 이런 어렸을 적 기억들 때문에 역사뿐만 아니라, 개인과 그 개인의 경험에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 흥미를 느꼈다고 얘기한다. 전후(戰後) 1946년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서 알튀세에게 배우기도 했다. 1960년부터 68년까지 끌레몽 훼랑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1970년부터 죽을 때까지 꼴레쥐 드 프랑스에서 사상체계의 역사'를 강의했다. 1978년에는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해 선(禪) 사상과 불교에 관해 연구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후기 구조주의자의 한 명으로, 푸코는 사회가 어떻게 불과 몇 가지 룰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운영되면서 다른 규범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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