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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이혼이 돌파구가 되다: 실베스터 스탤론의 탄생

페르소나12 2021. 3. 30.

가난한 무명의 배우는 캐스팅되기 위하여 시나리오를 쓰고 스스로 자신을 캐스팅을 하다!

그는 완벽한 인간형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생의 위기 상황을 돌파한 방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태어나는 순간 장애인이 되다.

실베스터 스탤론(본명:Sylvester Gardenzio Stallone)은 1946년 뉴욕의 뒷골목에 있는 자선병원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부모는 아기를 집에 데려와 유심히 살펴보니 한쪽 눈이 약간 처져 있는 등 이상 증상으로 보여 분만했던 자선병원으로 데려가 알아보니 분만 과정 당시 의사의 실수로 아기의 일부 안면신경이 끊기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태어나는 순간 눈의 밑 부분의 근육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얼굴 한쪽 부분의 표정이 없는 것은 그의 트레이트 마크가 되기도 합니다.

 

평탄치 못한 유년기

이러한 탄생 과정의 문제에 기인하여 대인기피증을 비롯 성장기 과정에 있어 타인들과의 관계는 그리 원할치 못했다.

따라서 매우 내성적이며 자신감도 부족했고 그러한 사내답지 못한 아이의 모습에 그의 아버지는 빈번한 구타를 일삼으며 혹독하게 키웠다고 한다.

 

록키(1976)- 실베스터 스텔론 어린시절 시진
록키(1976)- 실베스터 스텔론 어린시절 시진

이런 유년기를 거치며, 청소년이 된 그는 내재되었던 억눌림과 분노가 폭발하며 비행청소년의 길로 가게 된다. 각종 말썽과 폭력은 다반사였으며.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아버지는 더욱 더 그를 폭력적으로 다스리는 악순환의 연속이었고 급기야 퇴학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12살쯤에는 이미 13개의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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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이혼: 되려 돌파구가 생기다.

그러다 부모의 이혼으로 한동안 양가를 오가며 생활을 하다 결국 엄마 쪽에 안착하게 된다.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두개의 변화 가져다주는데 그것은 첫째, 아빠에서 게 벗어나게 되며, 둘째 새아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보통의 소년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겠지만 그가 처한 특별한 상황은 되려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 주게 된다.

 

새아버지는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으며,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새아버지는 자연스레 스포츠센터를 창업하게 되며, 덩달아 청소년이던 실베스터 스탤론도 자연스레 헬스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며 운동을 시작하게 되며 분노를 운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게 된다.

 

연기의 카타르시스를 알게 되다.

그가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판단하게 된 그의 어머니는 그를 스위스에 있는 사립 예술학교에 입학시키게 되고,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정신적 성장을 맛보게 된다.  교내 연극 활동으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란 작품을 공연을 하게 되며 내성적이며 자신감 없던 성격도 극복하게 되고 무엇보다 연기의 카타르시스도 알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되고 이후 마이에미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지속적인 연극 활동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곳에서는 어눌한 말투와 표정연기의 장애로 연기력에 대하여 혹평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잠시 좌절 하고 있다가 이내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곧장 배우가 되기 위하여 뉴욕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그곳에서 그는 극장 안내원, 피자배달원, 식당 종업원, 동물원 우리 청소 등 여러 아르바이트들를 전전하며 수많은 오디션을 보게 되지만 번번이 떨어지게 된다. 시간을 흐르며, 생활고는 점점 길어지고 심해졌으며, 급기야 포르노 영화의 출연도 하며 연명하던 차, 우연하게 TV에서 무하마드 알리와 척 웨프너의 권투시합을 보게 됩니다.

 

록키의 탄생(각본을 만들어 자신을 캐스팅 하다.)

당시 20대의 세계 최고의 헤비급 챔피언 선수인 알리는 40대의 무명 도전자인 척 웨프너를 지명하여 시합이 벌려지게 되었고 거의 모든 도박사들은 척의 1라운드 KO패를 예상하게 된다. 하지만 본 시합이 시작되고 1라운드도 지나가고 2라운드도 지나가고 예상외로 척 웨프너는 견디어 내었고 심지어 9라운드에 무하마드 알리를 KO 시키는 이변을 일으키게 된다.  이후 정말 피가 튀기던 전투 같던 시합은 마지막 15라운드 종료 19초를 남기고 심판은 경기를 종료시키게 되며 알리의 TKO승으로 마무리되었어나 판정의 순간 무엇인가를 이룬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환호를 외치던 척 웨프너의 모습을 지켜보던 실베스터 스탤론은 이야기를 영화화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며 곧장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필 받아 3일 만에 원고 작업을 마친 그는 그것을 여기저기 영화사들에 보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여러 영화사 관계자들은 생각보다 시나리오가 괜찮아 그에게 시 나라오 판매 의양을 물어보게 되나 그는 시나리오의 판매 조건을 이 영화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 영화사들과 접촉하던 중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라는 영화사와 계약을 하게 되나 무명인 그를 주인공으로 쓰는 조건으로 예산을 확 낮추고(당시 100만 달러) 당대 저예산으로 영화를 잘 찍는 것으로 유명했던 '존 G. 아빌드센' 이란 감독을 고용하여 록키 영화 제작을 착수하게 된다.

 

주인공이 시나리오 작가인 관계로 감독과 초기부터 구상을 많이 했다고 하며, 콘티 작업도 함께 하였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권투 영화가 거의 없다시피 하여 참조할 만한 테크닉이 없던 차에 감독은 마지막 시합 시퀀스를 대충 찍으려고 했으나 주인공이자 록키의 시나리오 작가인 실베스터 스탤론은 시합 시퀀스도 정확한 콘티 작업과 액션의 합 연습을 요청하며 결과적으로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하게 된다.(마지막의 먹먹한 감동의 신은 의외로 아폴로 크리드 역 배우의 주장이 투영된 부분도 있다.)

 

여주인공은 '탈리아 샤이어'는 대부에서 막내 여동생으로 출연한 배우이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실제 여동생이기도 하다.

 

쵤영회차는 28회였으며 워낙 저예산 영화이다 보니 그 유명한 장면인 시장에서 주인공이 달리던 신은 도둑쵤영이었고 심지어 상인이 주인공에게 사과를 던져 주는 장면은 연출된 장면이 아닌 도둑촬영 중 실제 상인이 건넨 컷을 편집하다 넣은 것이라 한다.

 

록키(1976)-훈련중 사과 받는 장면
록키(1976) 훈련중 사과 받는 장면

 

이렇게 열악한 조건에서 급조된 영화 '록키'는 1976년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고 오스카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도 수상 하게 된다. 참고로 1975년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는 '죠스', 1977년은 '스타워즈'다.

 

1977년 오스카 작품상 수상- 록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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